정원

안압지

블루107 2010. 7. 9. 21:54

안압지-660년 설계완성? 

 

 

고대 정원양식의 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안압지는 완벽하게 자연을 양식화 시켰습니다.

가산과 암석, 연못 등 안학궁에서 특징이 없이 흐릿하기만하던 정원은 안압지에서

명확한 모양새를 띱니다.

안압지는 세요소가 병렬적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직선적인 건축물인 인공적인 부분과 자연적인 부분을 분리시키는 연못, 곡선적이고 기교적인 가산.

 

건축

안압지의 건축에 대해서는 특별히 할 말이 없습니다. 조형예술이 발달했던 신라의 건축은 조형예술이 쇠퇴한 조선의 그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불상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신라의 건축도 상당히 화려했을 것 같습니다. 당연히 지금 세워져있는 건축은 솔직히 신라의 분위기를 느끼기에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수변

안압지에서 연못은 가장 중요한 정원의 요소입니다.

안압지를 만든 사람들은 안학궁의 정원과는 달리 바다를 모방한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복잡한 곡선의 수변은 마치 바닷가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합니다.

연못에 떠 있는 섬이 있어서 더욱더 그렇습니다. 육지의 호수에는 이렇게 다채로운 섬이 없으니까요.

더구나 물위에 떠 있는 암석은 더욱더 바다를 연상시킵니다.

인공적인 누각과 자연적인 가산을 물로 분리한 형태를 보고 바다를 형상화 했다는 주장에 동조할 수 밖에 없죠.

안압지에 세워진 건축물의 이름도 이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임해전(臨海殿)-바닷가 궁전

 

가산

흙을 쌓아만든 가산- 계곡과 주산 그리고 좌우의 산맥을 아주 잘 축소해놓았습니다. 그 사이에는 폭포까지 존재합니다.

지금 안압지의 가산은 키큰 나무들, 대나무군락 곧게자란 소나무 때문에 그 유기적 형태를 즐기기에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런 이유때문에 신라인들은 가산에 키큰 나무를 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수면가까이 서 있는 키큰나무는 베어버리거나 한두그루만 남기고 소나무도 경주남산에서나 볼 수 있는 휘어진 것을 드문드문 심어놓았으면 좋겠습니다. 대나무도 섬처럼 대여섯개씩 떨어뜨려 심어놓았으면 합니다.

 

안압지에서는 돌이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안압지 가산에서 돌배치는 여러 가지 형식을 보여줍니다. 물가에 돌 하나만 배치한 것부터 첩첩이 쌓기등.

이 정원의 가산의 돌쌓기야말로 정원돌쌓기의 모범답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수면가장자리를 따라서 배치된 돌은 실용적이기까지 합니다. 가장 인상적인 돌배치는 연못입수구에서 볼 수 있습니다. 계류의 돌배치와 폭포의 돌쌓기는 거의 이상적입니다.

안압지의 돌쌓기는 현대의 기계적인 돌쌓기와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현대의 돌쌓기는 정말 끔찍하기 그지없습니다.

도대체 아름다움이란 없습니다. 귀한 돌 낭비라니......

돌쌓기에 관심있는 분들이라면 제발 안압지를 참고하시기를.

 

안압지는 중국의 저 어느 곳을 모방해 만들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나라의 국운을 걸고 한창 적국(당나라. 670년 나당전쟁시작)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데 과연 적국의 정원요소를 혹은 정원의 이상향을 선택했을까요? 설마요. 아무리 당나라문화가 좋다고 해도 지금 자신의 나라를 빼앗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상황에서 절대로 가능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만일 중국의 어느 것을 모방했다면 그 흔적이 상징으로 남아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원안에서 상징을 찾아보기는 어렵습니다.

가산은 다만 산과 산맥을 만드는 역할만 할 뿐이고 돌들은 산에 존재하는 암석과 벼랑의 보습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공예적인(혹은 조형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줄 뿐입니다. 내용물에 담긴 아름다움이 그 목표일 뿐이었죠. 이것이 바로 조형적인 예술의 목표이죠. 조선시대처럼 회화가 발달한 상징의 세계에서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그렇기에 중국어디를 본따서 만들었다는 그 생각자체가 저는 상징의 세계에 살았던 인물의 주장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상징성은 조선시대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조선은 방지원도의 상징성을 위해서 다른 형식미는 포기했습니다.

상징성이 강하면 공예적인 아름다움은 희생된다는 것을 조선시대의 정원은 보여줍니다. 조선말기에 가면 상징성을 포기하고 다시 공예적인 아름다움을 선택한 정원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아무튼 고대 정원양식은 안압지로 완결을 본것 같습니다. 이런 양식은 일본으로 전해져서 축경식양식으로 정착되어서 전성기를 구가합니다.

 

사람들은 현대의 돌배치가 조금만 기교적이면 일본식이라고 빈정거립니다.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돌배치는 안압지가 이룩해낸 중요한 결실물중의 하나입니다. 일본 정원의 특징인 곡선적인 연못형식과 함께 우리 것입니다. 넓게 본다면 안압지의 정원형식은 동양이 공유하는 형식입니다. 그렇기에 기교적인 돌배치와 곡선적인 연못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라시대로 돌아가서 안압지를 상상해봅니다.

담장으로둘러쌓인 아늑한 정원.

누각에 앉아서 정원을 바라봅니다.

정원담장너머로 웅장한 황룡사구층탑이 그리고 왼편으로 규모가 작지만 탄탄해보이는 분황사의 탑이 보입니다. 어느 여름 저녁의 고요하고 흐릿한 정경속에서 이 탑들과 아름다운 정원은 이곳이 바로 이상향이라는 느낌을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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