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해, 무라카미 하루키, 민음사.

블루107 2013. 8. 8. 23:19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다자키 쓰쿠루는 고등학교 때 절친하게 지내는 친구 네 명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원하는 일을 하기위해서 고향인 나고야를 떠나 도쿄로 유학간 주인공은 여름방학 때 친구 네명에게서 이유도 듣지 못하고 갑자기 절교를 통보받는다. 이 일의 충격으로 주인공은 거의 반년동안 죽음만을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간신히 벗어난다. 이후 자신이 좋아하는 철도역을 짓는 회사에 취직해서 살아가지만 친구들에게서 받은 상처는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 타인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겉도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다자키는 우연히 소개팅으로 만난 기모토 사라에게 친구들에게서 절교당했던 일을 털어놓는다. 사라는 다자키의 친구들의 근황을 알려주면서 상처와 마주하라고 충고한다. 그는 절교의 이유를 알기위해서 십년 넘게 만나지 않은 네명의 친구를 찾아간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첫 번째 소설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부터 상당히 감동을 받았고 이후 상실의 시대에서 감탄을 했던 소설가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고독에 대해서 묘사하는데 아주 탁월하더군요.

최근에 그의 소설속의 주인공을 좀먹는 고독이 자본주의의 모순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그의 소설의 주인공은 사회의 아웃사이더 였습니다. 사회에 섞이지 못하고 걷도는 인물들이죠. 상실의 시대의 주인공뿐만아니라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던가 1973년의 핀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본주의가 사람을 어떻게 괴롭히는지는 강신주의 상처받지 않을 권리 라는 책에 아주 잘 묘사되어있습니다. 하루키가 자본주의 모순을 의도적으로 소설에 반영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명석한 두뇌로 보아 의도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맞겠죠.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가지 상표들이 그 증거라고 생각되기도 하네요.  

 

 

다자키가 등장하는 소설은 인간본래의 고독이 아니라 친구에게 절교당해서 느낀 고독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솔직히 상실의 시대의 바닥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정체모를 어떤 근원적인 고독과 비교가 안되더군요. 상실의 시대에서는 보이지 않던 고독의 이유를 이렇게 꺼내놓으니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뭔가 대단한 것이 작게 줄어들었다는 느낌. 아 이 작가도 수명이 다했구나. 그런 생각도 들면서. 하지만 여전히 그의 글은 매끄러웠습니다. 물론 전처럼 사람을 매혹시키는 것도 좀 부족해서 진도가 잘 나가지 않더군요.